ML 공인 에이전트가 말하는 메이저리그 윈터미팅
2016-12-19 일간스포츠
야구 에이전트가 되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한 게 4년 전이었다.
누군가 조언을 했다. “에이전트는 인맥이다. 야구 인맥을 넓히는 데는 메이저리그 윈터미팅만 한 곳이 없다.” 그래서 혼자 무작정 찾았다. 그곳은 ‘세계야구계 그 자체’였다. 메이저리그 30개 구단과 마이너리그 161개 구단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남미와 동아시아 야구인 등 야구와 관계된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 야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2016 메이저리그 윈터미팅은 12월 5~9일(한국시간) 워싱턴 DC 인근의 내셔널하버에서 열렸다. 올해로 4년째 참가하다보니 어느덧 처음 참석하는 이들이나 이곳에서 직업을 찾는 이에게 작은 조언도 하게 됐다. ‘로비에서 어색함을 이기고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라’이다. 윈터미팅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접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호텔 로비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2013년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열린 첫 윈터 미팅 때 로비에서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뿌린 명함만 수천 장이였다. 물론 대부분의 반응은 ‘의아함’이었다. 한국인? 여자가? 에이전트를? 그 불신을 견디고 ‘맨땅에 헤딩’한 시간이, 이제 자리잡기 시작한 내 작은 회사의 초석이 되었다고 믿는다.
1876년 처음 개최된 윈터 미팅은 1901년부터 연례행사가 됐다. 올해 워싱턴 DC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기분이 묘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스 구단과 계약을 위해, 김현수 선수와 함께 이 공항에 도착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1년 뒤, 메이저리그 공인 에이전트 자격(공인 에이전트는 반드시 현역 메이저리거를 대리해야 한다)으로 참가하는 윈터 미팅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해외리그 구단들의 한국 선수들에 대한 관심은 뜨거웠다. 이미 안면을 튼 많은 사람이 먼저 다가와 한국 야구에 대한 정보와 내 생각을 듣기를 원했다. 메이저리그 뿐 아니라 일본프로야구 관계자들까지 올해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선수, 내년시즌 후에 FA가 되는 선수에 대해 물었다. 한국 야구, 한국 선수에 대한 그들의 판단과 정보를 듣는 건 내 시각을 넓힐 수 있는 계기기도 했다. 아직 외국인 선수 정원을 채우지 못한 KBO리그 구단 담당자들도 분주하게 구단 관계자와 에이전트들을 만나러 다니는 모습이 포착됐다.
윈터미팅에서 구단 관계자 외에 많이 접할 수 있는 이들은 에이전트다. 윈터미팅에서는 대형선수들의 계약이 많이 이뤄진다. 윈터미팅의 좋은 점은 계약과 협상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데 있다. 이번 윈터 미팅에서 로비를 가장 뜨겁게 달궜던 화제는 특급 구원투수 아롤디스 채프먼과 켄리 젠슨의 거취였다. 두 선수 모두 비슷한 계약 조건을 원하고 있었고, 누가 먼저 어떤 조건으로 계약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두 선수의 에이전트들은 현장에서 치열한 정보전을 펼쳤다. 결국 윈터 미팅 마지막 날, 채프먼이 먼저 뉴욕 양키스와 5년 8600만 달러 짜리 초대형 계약을 맺었다.
이런 대형 계약이나 트레이드 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뤄진다. 메이저리그 여러 구단은 호텔 스위트룸을 얻어 ‘작전 본부’로 활용한다. 작년 윈터미팅에서 김현수 선수에게 관심을 보였던 팀들과도 주로 구단이 빌린 스위트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번 윈터미팅에서 예전부터 교류가 많았던 한 팀의 본부 스위트룸에 초대받아 갈 기회가 있었다. ‘잠 안 자고 일하기’로 유명한 그 팀의 단장은 윈터 미팅 사흘째를 맞아 다크 서클이 판다보다 진했다.
야구 이야기를 한참 나눈 뒤, “당신, 그렇게 일하다 큰일 나”라고 충고했다. 그 단장이 응수했다. “내가 당신에게 할 소리 같은데”. 그에겐 선견지명이 있었다. 4박5일 윈터 미팅 내내 열 시간도 잠을 자지 못하자 내 다크 서클이 그 단장보다 더 진해졌다. 윈터미팅에 참석한 대다수 사람들은 짧은 기간 동안 계약, 트레이드, 정보수집, 네트워크 확보 등 이유로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일을 한다.
몸은 파김치가 되지만 힘을 내게 하는 건, ‘온종일 야구이야기’가 주는 활력과 새 얼굴들의 패기다. 4년 전 나처럼,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하는 표정을 한 청년들이 자신을 소개하느라 분주했다. 윈터 미팅 때는 구단이나 에이전시 등 야구 관련 업계에 취직하려는 사람들이 ‘구직자’로 (Job Seeker) 등록한다. 그들은 명찰을 달고 이력서와 명함을 뿌리고 다닌다. 이런 사람들의 고용주가 될 팀은 대개 마이너리그 구단이다. 일자리도 인턴십인 경우가 많다. 그조차도 면접 기회가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런 만큼 매우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구직자들도 있다. 윈터미팅 이틀째, 모 구단 부사장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다가오더니 자신을 소개하고는 이력서를 건네고 갔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이였지만 자신있게 자신을 소개했다. 식사 중 부사장은 이력서를 잠시 검토하고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구단 인사 담당자에게 보냈다. 그 사람의 용기가 취업으로 이어졌을지, 내년에 꼭 물어볼 생각이다.
이번 윈터미팅에서는 구직자로 참가한 몇몇 한국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에이전트를 희망하는 한 학생은 내게 이력서를 건넸다. 내가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로비에서 틈틈이 나를 찾아다녔다고 했다. 잠시 시간이 빌 때 나를 찾아 진로에 대한 고민을 상담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내가 아는 최대한 많은 해외 구단 사람들에게 그들의 이력서를 건네줬다.
윈터미팅의 마지막을 알리는 행사는 룰5드래프트다. 메이저리그 각 구단 40인 로스터에 포함되지 않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열린다. 재능있는 선수들이 마이너리그에 썩는 걸 방지하기 위한 제도다. 룰5드래프트는 항상 윈터미팅 마지막 날 오전에 열린다. 드래프트가 끝나면 윈터미팅 행사장 로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진다.
순식간에 4박5일이 지났고, 한국에 돌아오니 마침 ‘KBO 윈터미팅‘이 시작됐다. KBO 윈터미팅은 메이저리그와 비교하면 이제 걸음마 단계다. 하지만 배운 것은 참 많았다. 마케팅과 스포츠 의학, 통계전문가 등 다양한 사람들의 한국 야구에 대한 다채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10개 구단 프런트부터 기자, 팬까지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돼 더욱 의미가 있었다. 언젠가 KBO 윈터 미팅이 ‘아시아 야구의 허브’로 자리 잡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이예랑
㈜리코스포츠에이전시 대표 / MLB 공인 에이전트/ 한국프로선수협회 자문위원
볼티모어 오리올스 김현수 에이전트
출처: http://sports.news.naver.com/wbaseball/news/read.nhn?oid=241&aid=0002623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