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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랑 대표] 조선일보 Why 지면 인터뷰

2018-10-20

 

톰 크루즈 같은 영화 속 ‘제리 맥과이어’를 기대한 예상은 빗나갔다. 김현수, 박병호, 강정호 등 국내 최고 스포츠 스타 70여명의 대리인 역할을 맡고 있는 스포츠 에이전트 이예랑씨는 우리 나이로 갓 마흔이 된 여성이었다. 아나운서로 방송 일을 하던 그는 스포츠 에이전트 길로 들어선 지 6년 만에 자신이 세운 법인 ‘리코스포츠 에이전시’를 업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키워냈다. 이 대표가 대리하는 선수들의 올해 연봉 총액만 120억원가량이다.

연봉 계약 때면 선수들이 으레 듣는 소리가 ‘형이 알아서 해줄게’란 말이었다. 에이전트 제도가 정착되지 않다 보니 선수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 에이전트를 자처하며 대리인 역할을 했던 것. 프로야구는 올해부터 공인 에이전트 제도를 도입했다.

“제가 여자다 보니 형, 동생 하는 문화에서는 경쟁이 안 돼요. 김현수를 처음 만날 때 50장짜리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지표를 바탕으로 명확하게 미래를 보여줬어요. 듣는 내내 놀라더니,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마자 저희와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처음엔 ‘여자 밑에서 무슨 운동을 하느냐’던 선수들이 다 제 관리를 받고 있죠.”

그의 무대는 국내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미국 메이저리그와 한국 프로야구 공인 에이전트 자격 모두를 가진 것도 이 대표가 최초. 김현수가 2년 700만달러의 좋은 조건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미국 언론이 시즌 시작 전 국내 리그에서 9년간 거의 전 경기를 출장한 그를 ‘아이언 맨’으로 불렀던 것도 그가 발로 뛰며 만든 일이다.

 

명함 든 코리안 걸

 

시작은 ‘맨땅에 헤딩’이었다. 생소한 일이다 보니 알려주거나 배울 만한 사람도 없었다. 이 대표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2013년 무작정 메이저리그 윈터미팅을 찾았다. 12월마다 열리는 윈터미팅에선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30개 구단 대표, 에이전트 등 야구 관계자들이 모여 자유계약선수의 진로, 트레이드 등 현안을 조율한다. 백인 남성이 주를 이루는 이 자리에 30대 중반의 동양인 여성의 존재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때였어요. 관리하던 선수도 많지 않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굴 만나야 하는지 정보도 없었습니다. 뻔뻔함 하나 믿고 갔죠.”

그는 윈터미팅의 메인 무대 격인 호텔 로비에 진을 쳤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에게 ‘한국에서 온 에이전트’라고 소개하며 말을 붙였다. 한국 스타일의 의례적 명함 교환이 없는 줄 알면서도 홀로 명함 두 통 반을 돌렸다. 소셜 미디어로도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전부 메시지를 보냈다. “어색했죠. 외면하는 사람도 많았고. 몇 명이라도 대화하면 소득이 있는 정도였지만 무조건 인사하고 각인시켜 놓자는 생각만 했습니다.”

 

―사람을 아는 게 에이전트 업계에서 힘이 되나요.

 

“한국이나 미국이나 열쇠는 결국 신뢰예요. 한 사람을 알게 되면 또 그 사람을 통해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업계에선 인맥과 네임 밸류가 큰 자산이에요. 저의 평판이 올라가면 선수 계약도 그만큼 수월해집니다.”

 

―명함 돌리기가 효과가 있던가요.

 

“신기해하더군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KBO 측에 ‘코리안 걸, 이예랑이 누구냐’고 물어오기도 했으니까요. 두 번째 참석했을 땐 그 효과인지 무척 반가워해요. 그런 시간이 쌓이다 보니 누구를 만나야 하고 어떤 사람이랑 이야기해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 윈터미팅 때는 하루에 3시간밖에 못 잘 정도로 바빴어요. 마지막 날 잠 한숨 못 자고 새벽에 공항을 가기 위해 나왔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이렇게 미팅도 하고 만날 사람이 생겼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부딪칠 수 있는 동기가 뭔가요.

 

“절박함. 이 일도 늦게 시작했지만, 아나운서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 또래만 해도 언론사 아나운서는 전형적 상이 있었어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다 보니 스물여덟 살에야 아나운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좀 많았던 거죠. ABC나 CNN을 보면 나이 많은 여성도 앵커를 하는데. 그래도 절박함이 있으니 일이 풀리더군요.”

 

―보통 전통적 채용 방식이 있기 마련인데요.

 

“모 방송사에서 영어로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무작정 이력서 들고 방송국을 찾아갔습니다. 로비에 있는 경비분께 모 CP님께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라도 해봐야 아쉽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CP님이 실제로 이력서를 보고 연락을 줬어요. 방송국에 시스템이란 게 있으니 바로 채용할 순 없고, 외주사에 추천해줄 테니 가보라는 거였어요.”

이 대표가 기자의 명함을 가리키더니 말을 이어간다. “행사에 가면 PD들이 앉는 좌석이 있고 거기에 명함을 붙여놓는 경우가 있어요.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청소 아주머니들이 의자를 정리하실 때 도우면서 명함을 뜯었어요. 그래서 이력서를 보내고 제 소개도 드렸죠. 결국 공중파에서 라디오 방송도 진행하게 되고 좋은 프로그램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런 걸 누가 가르쳐 주던가요.

 

“몸에 밴 거죠(웃음). 스포츠 에이전트를 생각하고 다시 미국에서 석사를 할 때도 비슷했어요. 스포츠 비즈니스 학과 학장님 수업의 수강 신청을 못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 피치’를 했어요. 교수님이 다른 강의실로 가는 3분간 저의 경험과 꿈, 수업을 들으면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다는 등의 얘기를 했죠. 물론 두서없는 이야기였지만 나중에 그런 것이 인연이 돼 교수님이 LA 다저스 전 단장, 사무국 관계자, 에이전시 대표 등 여러 명을 소개해 줬어요.”

 

―에이전트를 하게 된 이유는 뭔가요.

 

“방송 일도 좋았지만 사실 제 전문 분야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왔습니다. 워낙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야구 선수를 많이 알았어요. 제가 세금이나 재테크 문제에 관심도 많고 하니까 주택 청약 같은 것도 설명해주고, 세금 신고 방법, 언론 대응법 등도 이야기해줬어요. 얘기를 하면 할수록 선수 관리가 전문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차라리 내가 에이전트를 해보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더군요.”

 

―방송 아나운서와 에이전트는 격차가 큰 것 아닌가요.

 

“주변에서 그렇게 이야기들 합니다. 그런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은 없는 것 같아요. 이쪽 일에서 대화나 협상이 많다 보니 밀고 당기기라고 할까요, 그런 것들이 중요해요. 언어의 선택이나 사람 만날 때 태도가 아무래도 영향을 많이 주는 일인 거죠. 방송일 한 것이 그런 면에서 굉장히 도움이 됩니다. 생방송을 했으니 어떤 때든 긴장을 덜하는 것도 그렇고요.”

 

김현수 계약 땐 프레젠테이션 50장

 

‘여자 밑에서 무슨 운동을 하느냐’란 말이 사라지는 데는 5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야구판에서 가장 많은 선수를 대리하는 에이전트가 됐다.

 

―에이전트 간 경쟁도 치열한데, 선수 마음을 잡는 방법은 뭔가요.

 

“제가 열심히 뛰면 선수들도 알게 돼요. 미국에 보내고 싶은데, 처음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를 모르니까 잠실 야구장에 매일 가서 외국인만 보면 말을 걸었어요. 고교 야구에선 스피드 건만 들고 있으면 졸졸 따라다녔죠. 지금은 옷차림만 봐도 관계자를 콕 찍어 알아봅니다.”

 

―다른 에이전트들은 그렇게 하지 않나요.

 

“항상 좋은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나성범 때는 더 많은 양의 자료와 여러 준비를 했지만, 스콧 보라스 쪽으로 갔죠. 여자다 보니 장점과 단점이 있어요. 다만 저는 모든 선수와 계약할 때 약속을 합니다.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기로. 저도 선수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다 들어줄 순 없어요.”

 

―경기 내외 관련 지식도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처음엔 선수들이 현장에서의 언어를 써 당황한 적도 많습니다. 어떤 선수가 ‘뽕 스파이크 하나 준비해 줘’이러는데, 단어 자체를 몰랐어요. 그래서 선수들이 신는 스파이크 등 장비류를 다 정리했어요. 어떤 선수는 무슨 스파이크를 신고, 밑이 가죽인 것과 플라스틱인 것은 뭐가 다르고 상표에 따라선 어떻게 다르고. 이제는 제가 선수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상황이 된 거죠. 선수 자체에 대해서도 분석과 공부를 합니다. 괜히 김현수, 박병호 전문가라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그런 김현수, 박병호가 메이저리그에서 실패해 돌아왔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2016년에 김현수와 박병호가 볼티모어 홈 구장에서 데뷔전을 같이 치렀어요. 그때 김현수가 마이너리그 거부권을 행사한 탓에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첫 경기 선수 소개 때 야유가 나오는데 가슴이 찢어지더군요. ‘내가 더 강하게 채찍질할 부분이 있었나, 뭘 더 했어야 할까’란 생각에 시달렸습니다.”

 

에이전트라는 직업의식

 

국내 에이전트 계보를 따지자면 이 대표는 1.5세대쯤 된다. 그 앞에 있던 1세대 에이전트들은 지금은 활동하고 있지 않다. “처음 에이전트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때 왜 1세대 에이전트들이 사라졌을까부터 공부했어요. 해외 진출 선수들을 직접 만나서 에이전트가 선수들과 멀어진 이유 등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점이 눈에 들어오던가요.

 

“에이전트로서의 직업의식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과 얘기할 때 한국 에이전트들을 굉장히 낮게 취급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선수 한 명 팔아치우려고 거짓말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저는 선수들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메이저리그는 야구 실력뿐 아니라, 성격이나 사소한 버릇 등도 파악한 뒤 계약하려 하니까요. 거짓말은 금방 드러납니다.”

 

―LA 다저스에서 류현진을 계약할 때 그가 출연한 예능까지 보면서 분석했다더군요.

 

“상상 이상으로 분석하고 공을 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에이전트 평판 관리도 중요합니다. 제가 회사를 차린 것도 명함만 돌릴 것이 아니라 버젓한 법인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미국인들은 이런 점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최근 국내 프로야구 선수협이 공인 에이전트를 뽑았습니다.

 

절반이 변호사더군요. “법적인 부분이 중요하고 도움이 많이 됩니다. 변호사가 에이전트가 안 되라는 법도 없지만, 반대로 꼭 변호사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에 대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선수를 이해하고 선수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누가 가르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은퇴 후에도 선수를 관리해 준다고요.

 

“롯데에서 뛰었던 조성환 선수 같은 경우 은퇴하고 저희 사무실에 계속 나왔어요. 타자 연습부터 하시라고 했죠(웃음). 파워포인트도 가르쳐 드리고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해서 제가 가르쳐 드렸죠. 방송사 해설위원 계약도 저희를 통해 했고요.”

 

―너무 많은 것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은 없나요.

 

“저한테 짜증 내고 화내는 선수도 있습니다. 주위에서 대표가 이리저리 치이냐는 말도 들어요. 선수들은 감독이나 부모한테 그런 얘기를 못해요. 저한테라도 하다 보면 다른 이야기도 하게 되고, 저는 이 선수에게 지금 뭐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직원 뽑을 때 배려심 같은 요소도 평가해요.”

 

―최근엔 강정호 등 경우를 보면 쓴소리도 필요한 것 아닌가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일이죠. 강정호는 그렇지 않지만 싫은 소리 하는 사람을 옆에 두지 않는 선수도 있어요. 주변에서 운동 잘한다고 치켜세워 주기만 하다 보니 그런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수록 재교육도 필요하고요. 강정호도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느끼고 있어요. 잘못을 얘기하는 시간도 더 가져야 합니다. 그걸 돕는 게 제 몫이기도 하죠.”

 

조선일보, 김아사 기자

기사 출처: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404979?sid=102